교실 에세이금기보다 권리 가르치기



금기보다 권리 가르치기

2023.6.12. 나은

  3학년을 맡았을 때 일이다. 서로가 서먹한 3월 초, 어떤 반을 만들고 싶은지 궁금해 첫 학급회의를 했다. 몇몇 어린이가 발표를 제발 시켜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팔이 빠질 듯이 손을 들었다. “인종이나 성별로 차별하지 않는 반이요.” 
덤덤한 척 했지만 속으로 매우 놀라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겨우 2학년에서 올라온 아이들이, 도대체 작년에 무엇을 배웠길래 저런 대답이 나올 수 있는 거지? 어쩜 이런 아이들이 딱 우리 반으로 온 거지? 속으로 만세를 부르고 그 기쁨이 숨길 수 없는 미소로 새어나오기까지 했다. 아 올해 1년이 정말 기대된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슬슬 아이들 입에서는 흠칫 놀랄 만한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남자는 주먹이지.”, “여자애들은 체육시간에 열심히 안 해요.”, “엄마가 다이어트 하래요.”,“얼굴 못생겼어.” ... 역시 내가 너무 안일했나..? 성차별적 발언과 외모평가가 우리 반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성평등 수업 시작하기 전까지는 너무 발끈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수업할 기회가 생기기를 벼르고 있었다. 다행히도 3학년 교육과정에는 성평등 주제를 연계해서 수업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 결과물로 어린이들이 만든 “평소답게”,“나답게”,“OO이 답게” 등의 문구는 고민없이 교실 뒷 게시판 한 면을 차지하게 되었다. 다시 차별적 발언이나 혐오표현들이 우리 교실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평화를 되찾았다. 

  아니, 되찾은 듯 했다. 효과는 얼마 가지 못했고 마치 관성처럼 혐오표현과 성차별적 발언들이 제자리(?)를 찾아왔다. 성평등 교육의 효과는 딱 그때뿐인 걸까? 내가 잘 가르치지 못한 탓일까? 수업으로는 한계가 있는 걸까? 한창 이런저런 고민이 들 때쯤 우연히 환경교육 연수를 듣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에너지 센터 국장님이 건넨 말씀이 묘하게 위로와 응원이 됐다

“지금 태어난 아이들은 죄가 없어요.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기후 위기 상황에 놓였을 뿐이죠. 반면 지금의 어른들이 어렸을 때는 기후 위기 같은 걸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 지금 우리가 아이들에게 플라스틱 쓰지 마라, 일회용품 쓰지 마라, 에어컨 덜 틀어라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부과되는 금기사항들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사는 금기 대신 아이들이 잃어버린 권리를 찾도록 돕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본인들이 주인이 되어 살아갈 지구를 위한 법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할 권리 말이에요. 이를테면 과대포장 과자 기업에 편지를 써 보낸다든지 해서, 본인들이 쓰레기를 덜 소비하며 과자를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해보게 하는 거죠.

  우리 교실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금 이 어린 아이들은 죄가 없다. 태어났더니 성차별적 발언이나 성별 고정관념이 깊게 박힌 그런 세상에 놓였을 뿐이다. 차별은 어른들이 만들어놓고서, 금기는 어린이들에게만 늘어놓고 있는 건 아닐까? 나도 대학생이 되어서야 깨달은 문제들을 지금의 어린이들에게 똑같이 적용해가며 어린이들 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어린이가 말실수를 했을 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잘못이야. 안 돼.”라고 가르치는 데에 중점을 두었던 나를 반성하게 됐다이제는 어린이들이 질문을 제기하고, 평등하게 누릴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먼저 요구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어린이’라서 받는 차별에 이의를 제기할 권리,  여자라서/남자라서 들어야 했던 말을 듣지 않을 권리를 먼저 가르치고, 그 다음에 당사자인 아이들이 차차 변화하기를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성평등 교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성평등 수업도 고심해서 하고, 어린이들이 일상에서 젠더감수성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어린이도 있고 관성처럼 다시 돌아오는 어린이도 있다. 하지만 이젠 괜찮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들도 이제 막 배워나가는 중이니 어린이를 섣불리 원망하거나 내 수업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예전에는 툭툭 내뱉는 말 한 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혼내기 급한 나였지만 이제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어린이들이 당장 이 세상에 큰 변화를 만들 순 없을 거다. 이 세상의 법과 정책을 만드는 중요한 일들은 모두 어른들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이들에게는 평등하고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나부터 그걸 잊지 않으려 한다. 나의 성평등 교실은 차별없는 세상을 바라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가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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