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선택이라는 모순 속에서
2023. 06. 04. 무빙
“여자가 애 키우면서 일하기엔 초등교사만 한 게 없지.”
초등학교 시절 처음 들었는데도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나는 말이다. 경북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이런 류의 말을 종종 들었기 때문일 거다. “1등 신붓감이니 시집 잘 가겠네!”, “여자들은 육아휴직 잘 쓸 수 있는 직업 고르는 게 좋지, 애는 엄마가 키워야하는 법인데.” 와 같은 말들. 어머니께서는 늘 결혼을 늦게 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그것만으로도 ‘개방적인 엄마’라는 평을 얻을 수 있었다. 결혼은 여자에게 필수이며 출산은 인생의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환경 속에서 나는 ‘스스로’ 초등교사를 꿈꿨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10년 가까이 내 꿈은 변하지 않았고 운 좋게도 원했던 직업을 갖게 되었다. 대학 시절을 보내면서도, 임용고시를 몇 번 치르면서도 이 직업을 선택한 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주체적인 내가 한 나의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시험에 합격해서 현장에 나오면서부터 큰 혼란을 느꼈다. 왜 이 직업을 간절히 원했는지 도무지 모르겠고 되레 허무하기만 했다. 물론 어떤 직업이든 밖에서 본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은 다르겠지만, 원래 그렇다고 넘겨버리기엔 버겁고 공허했다. 뒤숭숭해진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내가 이 직업을 갖기 위해 지나온 발자취를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애증(?)의 근무지, 학교란 무엇인가 교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수년 전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교사가 되려했던 이유를 다시금 떠올리고 적잖이 충격받았다. 교사, 특히 초등교사는 여자로서 아이를 키우며 일하기에 더없이 좋은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계획은 쓸데없이 구체적이었다. 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즐겨보며 결혼은 물론이고 아이도 셋 이상은 낳을 거라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다. 지방에서 누리지 못한 교육·문화 인프라의 아쉬움이 늘 있었기에 '제2의 강남'이라던 분당 신도시가 아이 키우기에 제격이라며 그 지역 교대를 목표로 잡았다. 태어나지도 않은 내 미래의 아이를 위해, 만나지도 않은 배우자와의 결혼생활을 위해 고등학생인 내가 교사를 꿈꾸게 됐던 것이다.
당시에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스스로 골랐다고 생각했다. 초등교사를, 교육대를 희망한다고 했을 땐 만나는 이들 모두가 칭찬하고 박수를 보냈고 존중해주었다. 다른 선택지를 제안한 이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사실은 진정으로 여러 선택지 중에 고민했던 게 아니라 애초에 하나의 답을 두고서 '선택'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슬프게도 지금은 그 뚜렷했던 의미가 너무나도 무색해져버렸다. 더 이상 결혼이 필수라 생각지 않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삶과 나의 심적 거리는 한참 멀어졌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페미니즘을 접하면서부터 사회가 원하는 선택이 아니라 내가 오롯이 원하는 것을 고민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껏 해온 선택이 내가 진정으로 바라던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한 번 슬프게도, 교실에서 그때의 나를 본다.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타고난 성차라고 여기며 학생들을 사회적인 틀에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 속에서 여학생들은 고학년이 되면 외모 꾸미고 몸매를 드러내는 것을 ‘선택’하고, 남학생들은 꼼꼼하게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취미를 ‘선택’하기 어려워한다. 4학년이면 여학생 중 두셋은 틴트를 학교에 가져오고, 팩트형 선크림을 사용한다. 활동에 불편한 크롭 티와 짧은 치마를 선택하고, 사진 찍을 때는 꾸미지 않은 얼굴을 부끄럽다며 가리기 바쁘다. 아이들에게 정말 스스로 원하는 것들이냐고 묻고 싶지만, 물어도 지금은 스스로 깨달을 수 없을 것임을 안다.
진짜 자발적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면서부터 학생들을 어떻게 진짜 선택을 해나가는 주체로 길러낼 수 있을지 고심하게 된다. 어린이의 선택을 존중하고자 하는 노력과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선택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 서로 충돌하곤 한다. 늘 염두에 두는 건 나의 가르침이 학생들에게 또 하나의 강요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저 선생님이 시키니까 따르기보다는 학생들 스스로 발견하며 제 삶을 가꾸어가기를 바란다. 물론 이 과정은 너무 더뎌서 무력해지는 순간이 온다. 가정, 학교 사회에서 학생들은 성차별적인 상황과 어른의 답에 끼워 맞춰지고 평가받는 상황에 숱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교실에서만큼은 학생들이 고정관념 상자를 나오는, 아웃박스를 경험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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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선택이라는 모순 속에서
2023. 06. 04. 무빙
“여자가 애 키우면서 일하기엔 초등교사만 한 게 없지.”
초등학교 시절 처음 들었는데도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나는 말이다. 경북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이런 류의 말을 종종 들었기 때문일 거다. “1등 신붓감이니 시집 잘 가겠네!”, “여자들은 육아휴직 잘 쓸 수 있는 직업 고르는 게 좋지, 애는 엄마가 키워야하는 법인데.” 와 같은 말들. 어머니께서는 늘 결혼을 늦게 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그것만으로도 ‘개방적인 엄마’라는 평을 얻을 수 있었다. 결혼은 여자에게 필수이며 출산은 인생의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환경 속에서 나는 ‘스스로’ 초등교사를 꿈꿨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10년 가까이 내 꿈은 변하지 않았고 운 좋게도 원했던 직업을 갖게 되었다. 대학 시절을 보내면서도, 임용고시를 몇 번 치르면서도 이 직업을 선택한 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주체적인 내가 한 나의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시험에 합격해서 현장에 나오면서부터 큰 혼란을 느꼈다. 왜 이 직업을 간절히 원했는지 도무지 모르겠고 되레 허무하기만 했다. 물론 어떤 직업이든 밖에서 본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은 다르겠지만, 원래 그렇다고 넘겨버리기엔 버겁고 공허했다. 뒤숭숭해진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내가 이 직업을 갖기 위해 지나온 발자취를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애증(?)의 근무지, 학교란 무엇인가 교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수년 전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교사가 되려했던 이유를 다시금 떠올리고 적잖이 충격받았다. 교사, 특히 초등교사는 여자로서 아이를 키우며 일하기에 더없이 좋은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계획은 쓸데없이 구체적이었다. 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즐겨보며 결혼은 물론이고 아이도 셋 이상은 낳을 거라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다. 지방에서 누리지 못한 교육·문화 인프라의 아쉬움이 늘 있었기에 '제2의 강남'이라던 분당 신도시가 아이 키우기에 제격이라며 그 지역 교대를 목표로 잡았다. 태어나지도 않은 내 미래의 아이를 위해, 만나지도 않은 배우자와의 결혼생활을 위해 고등학생인 내가 교사를 꿈꾸게 됐던 것이다.
당시에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스스로 골랐다고 생각했다. 초등교사를, 교육대를 희망한다고 했을 땐 만나는 이들 모두가 칭찬하고 박수를 보냈고 존중해주었다. 다른 선택지를 제안한 이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사실은 진정으로 여러 선택지 중에 고민했던 게 아니라 애초에 하나의 답을 두고서 '선택'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슬프게도 지금은 그 뚜렷했던 의미가 너무나도 무색해져버렸다. 더 이상 결혼이 필수라 생각지 않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삶과 나의 심적 거리는 한참 멀어졌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페미니즘을 접하면서부터 사회가 원하는 선택이 아니라 내가 오롯이 원하는 것을 고민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껏 해온 선택이 내가 진정으로 바라던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한 번 슬프게도, 교실에서 그때의 나를 본다.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타고난 성차라고 여기며 학생들을 사회적인 틀에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 속에서 여학생들은 고학년이 되면 외모 꾸미고 몸매를 드러내는 것을 ‘선택’하고, 남학생들은 꼼꼼하게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취미를 ‘선택’하기 어려워한다. 4학년이면 여학생 중 두셋은 틴트를 학교에 가져오고, 팩트형 선크림을 사용한다. 활동에 불편한 크롭 티와 짧은 치마를 선택하고, 사진 찍을 때는 꾸미지 않은 얼굴을 부끄럽다며 가리기 바쁘다. 아이들에게 정말 스스로 원하는 것들이냐고 묻고 싶지만, 물어도 지금은 스스로 깨달을 수 없을 것임을 안다.
진짜 자발적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면서부터 학생들을 어떻게 진짜 선택을 해나가는 주체로 길러낼 수 있을지 고심하게 된다. 어린이의 선택을 존중하고자 하는 노력과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선택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 서로 충돌하곤 한다. 늘 염두에 두는 건 나의 가르침이 학생들에게 또 하나의 강요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저 선생님이 시키니까 따르기보다는 학생들 스스로 발견하며 제 삶을 가꾸어가기를 바란다. 물론 이 과정은 너무 더뎌서 무력해지는 순간이 온다. 가정, 학교 사회에서 학생들은 성차별적인 상황과 어른의 답에 끼워 맞춰지고 평가받는 상황에 숱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교실에서만큼은 학생들이 고정관념 상자를 나오는, 아웃박스를 경험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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