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던 3월 어느 날, 아침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데 학생 한 명이 아직 등교를 안 했다. 연락을 드려보니 아이가 배가 아파서 좀 늦는다고. 다음날이 되자 이번에는 보호자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다. “배가 아프다더니 생리를 시작했네요, 힘들어하면 조퇴하게 해 주세요.”라고. 아, 월경을 벌써 시작하는구나. 하긴 나 초등학생 때도 4학년에 시작하는 친구들이 있었으니, 지금은 더 많겠지. 우리 반에서도 월경수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리 결말을 이야기하자면 두 번째 4학년 담임을 맡았음에도, 여전히 월경 수업은 못하고 있다. 월경 수업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테지만, 이게 뭐라고 참 쉽지 않다. 이 글은 아웃박스 멤버가 된 지 3년을 넘기고 있는 내가 왜 월경 수업을 아직도 못했는가에 대한 자책과 반성이기도 하다.
거의 유일한 이유는 국가수준 교육과정에 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월경을 비롯한 '사춘기가 동반하는 신체적 변화'에 대해서는 초등학교 5-6학년(체육)과 중학교(자율활동)에서 다룬다. 그래서 지금은 왜 월경을 4학년에서 다루냐고 물어온다면 나의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답해야 한다. 물론 근거 없는 판단은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초경 시기는 6학년이 36%, 5학년이 24%로 높지만 4학년에 시작했다는 비율도 6%는 된다. 4학년 학생들도 분명 월경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월경에 대한 호기심보다 걱정이 앞선 학생들을 생각하면 월경 시작 전에 수업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또, 꼭 자신이 월경을 안 하더라도 언니, 누나, 엄마, 이모가 월경을 하고 있을 테니 가까운 이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위한 수업으로도 충분히 진행할 가치가 있다.
※ 사실 2021년에 아웃박스가 국가수준 교육과정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포괄적 성교육 관점으로 『학교 성교육 다시, 쓰기』를 발행했는데 월경, 몽정, 발기 등의 신체적 반응을 3-4학년군에서 다루도록 하였다. 이 내용이 국가수준 교육과정에 반영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다시 질문해 볼 수 있다. 왜 이런 걱정을 하느냐? 누가 국가수준 교육과정을 찾아본다고? 기우라고 할 수 있지만, 월경 수업에 민원을 넣을 누군가는 찾아볼 것 같다. 나의 개인적 판단에 대한 의심, 나아가 교사로서의 전문성까지 공격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결국, 민원과 그 민원이 가져올 여러 난처한 과정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수업하고 싶은 마음보다 컸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4학년 월경 수업의 공식적·객관적 근거가 부재한 상황이 내겐 잔디밭 옆 진흙길처럼 다가왔다. 굳이 선택하고 싶지 않은 길.
물론 알고 있다, 보호자는 함께 협력하여 어린이를 길러내는 가장 귀한 동료라는 걸. 그저 예비 민원인처럼 여기면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잃는 거라는 것도. 실제로 돌이켜보면 나 또한 기후위기, 장애이해, 노동인권 등 다양한 주제를 교실에서 다룰 때마다 보호자의 든든한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언론에서 다루는 우려스러운 이야기들 때문인지, 성평등 교육만은 할 때마다 괜스레 민원부터 걱정하게 된다.
소통 부족에 의한 오해로 민원이 발생하지 않도록 열심히 말을 걸고 안내해야 하는 건 내 쪽이다. 3월 초 보호자와의 래포 형성을 위해 각별히 노력한다든가, 성교육 전에 수업 목적과 과정을 안내하고 바라는 점을 듣는다든가. 하지만 그런 친밀한 관계 쌓기 전략도 내겐 영 어색해서 해마다 너무 어려운 과제다.
그럴 때면 영화 <원더>에 등장하는 명언을 생각한다. “옳음과 다정함 중에 골라야 한다면, 늘 다정함을 선택하라”

옳음을 버리고 친절하라는 게 아니라 다정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결국 옳은 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말로 이해했다. 내가 옳다고 믿는 실천에 다정함이 녹아있지 않다면 상대도 냉담하기 마련이고, 그 냉담과 싸우다가 목적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내가 지쳐버리지 않을까. 보호자님과 한편에 서서 월경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서로 충분히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과정이 어쩌면 월경교육 그 자체보다 중요할지도 모른다. 어렵더라도 다정하게 소통하며 성평등교육을 해나가길 바란다고, 그 명언이 끈질기게 다독여주는 듯하다.
성평등 수업자료를 개발할 때에는 ‘빌드업’이 중요하다는 어떤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하고 싶은 월경수업 자료는 이미 개발되어 있다. 이제 자료가 아닌 나에게 필요한 ‘빌드업’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며, 이 글이 자책으로 끝나는 회고록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다정함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현재진행형의 글이 되도록 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해본다.
정신없던 3월 어느 날, 아침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데 학생 한 명이 아직 등교를 안 했다. 연락을 드려보니 아이가 배가 아파서 좀 늦는다고. 다음날이 되자 이번에는 보호자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다. “배가 아프다더니 생리를 시작했네요, 힘들어하면 조퇴하게 해 주세요.”라고. 아, 월경을 벌써 시작하는구나. 하긴 나 초등학생 때도 4학년에 시작하는 친구들이 있었으니, 지금은 더 많겠지. 우리 반에서도 월경수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리 결말을 이야기하자면 두 번째 4학년 담임을 맡았음에도, 여전히 월경 수업은 못하고 있다. 월경 수업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테지만, 이게 뭐라고 참 쉽지 않다. 이 글은 아웃박스 멤버가 된 지 3년을 넘기고 있는 내가 왜 월경 수업을 아직도 못했는가에 대한 자책과 반성이기도 하다.
거의 유일한 이유는 국가수준 교육과정에 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월경을 비롯한 '사춘기가 동반하는 신체적 변화'에 대해서는 초등학교 5-6학년(체육)과 중학교(자율활동)에서 다룬다. 그래서 지금은 왜 월경을 4학년에서 다루냐고 물어온다면 나의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답해야 한다. 물론 근거 없는 판단은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초경 시기는 6학년이 36%, 5학년이 24%로 높지만 4학년에 시작했다는 비율도 6%는 된다. 4학년 학생들도 분명 월경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월경에 대한 호기심보다 걱정이 앞선 학생들을 생각하면 월경 시작 전에 수업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또, 꼭 자신이 월경을 안 하더라도 언니, 누나, 엄마, 이모가 월경을 하고 있을 테니 가까운 이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위한 수업으로도 충분히 진행할 가치가 있다.
※ 사실 2021년에 아웃박스가 국가수준 교육과정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포괄적 성교육 관점으로 『학교 성교육 다시, 쓰기』를 발행했는데 월경, 몽정, 발기 등의 신체적 반응을 3-4학년군에서 다루도록 하였다. 이 내용이 국가수준 교육과정에 반영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다시 질문해 볼 수 있다. 왜 이런 걱정을 하느냐? 누가 국가수준 교육과정을 찾아본다고? 기우라고 할 수 있지만, 월경 수업에 민원을 넣을 누군가는 찾아볼 것 같다. 나의 개인적 판단에 대한 의심, 나아가 교사로서의 전문성까지 공격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결국, 민원과 그 민원이 가져올 여러 난처한 과정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수업하고 싶은 마음보다 컸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4학년 월경 수업의 공식적·객관적 근거가 부재한 상황이 내겐 잔디밭 옆 진흙길처럼 다가왔다. 굳이 선택하고 싶지 않은 길.
물론 알고 있다, 보호자는 함께 협력하여 어린이를 길러내는 가장 귀한 동료라는 걸. 그저 예비 민원인처럼 여기면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잃는 거라는 것도. 실제로 돌이켜보면 나 또한 기후위기, 장애이해, 노동인권 등 다양한 주제를 교실에서 다룰 때마다 보호자의 든든한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언론에서 다루는 우려스러운 이야기들 때문인지, 성평등 교육만은 할 때마다 괜스레 민원부터 걱정하게 된다.
소통 부족에 의한 오해로 민원이 발생하지 않도록 열심히 말을 걸고 안내해야 하는 건 내 쪽이다. 3월 초 보호자와의 래포 형성을 위해 각별히 노력한다든가, 성교육 전에 수업 목적과 과정을 안내하고 바라는 점을 듣는다든가. 하지만 그런 친밀한 관계 쌓기 전략도 내겐 영 어색해서 해마다 너무 어려운 과제다.
그럴 때면 영화 <원더>에 등장하는 명언을 생각한다. “옳음과 다정함 중에 골라야 한다면, 늘 다정함을 선택하라”
옳음을 버리고 친절하라는 게 아니라 다정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결국 옳은 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말로 이해했다. 내가 옳다고 믿는 실천에 다정함이 녹아있지 않다면 상대도 냉담하기 마련이고, 그 냉담과 싸우다가 목적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내가 지쳐버리지 않을까. 보호자님과 한편에 서서 월경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서로 충분히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과정이 어쩌면 월경교육 그 자체보다 중요할지도 모른다. 어렵더라도 다정하게 소통하며 성평등교육을 해나가길 바란다고, 그 명언이 끈질기게 다독여주는 듯하다.
성평등 수업자료를 개발할 때에는 ‘빌드업’이 중요하다는 어떤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하고 싶은 월경수업 자료는 이미 개발되어 있다. 이제 자료가 아닌 나에게 필요한 ‘빌드업’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며, 이 글이 자책으로 끝나는 회고록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다정함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현재진행형의 글이 되도록 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