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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 아웃박스 교사 에세이가 연재됩니다.
교실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교사들의 고민, 수업 아이디어 나눔까지! 아웃박스 교사들이 나눌 다양한 이야기, 기대해 주세요!
나의 성평등한 학급 운영 필수템
22.05.01. 초식공룡

(나의 성평등한 학급 운영 필수템)
새학기 준비 기간이 되면 가장 먼저 준비하는 교구가 있으니, 일명 '뽑기 막대'다. 출석 번호부터 자리, 체육 팀 구성까지 이 막대기를 뽑아서 정한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학교 자료실을 뒤적여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찾는다. 우리 반 학생 수에 맞게 21개를 챙겼다. 그리고 막대의 한쪽 끝에 매직으로 1부터 21까지 번호를 적으면 끝. 담아 둘 마땅한 통이 안 보여서 다 먹고 남은 커피 상자에 넣어두었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 완성된, 어찌 보면 볼품없고 초라한 이 스물 한 개의 막대기가 나의 성평등한 학급 운영 필수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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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호 정하기
슬프게도 우리 학교는 아직 출석 번호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있다. 한 해는 남자가 앞 번호, 다음 해는 여자가 앞 번호를 번갈아가며 하는 식이다. 그래서 우리 반은 3월 첫 날 번호를 새로 정한다. 막대기를 뽑아 정하는 번호라고 하여 '뽑기 번호'라고 부른다. 방법은 간단하다. 한 명 씩 나와 막대기를 뽑는다. 막대에 적힌 숫자가 1년 간 함께 할 자신의 뽑기 번호다.
뽑기 번호 덕분에 손쉽게 성별 구분 없이 줄을 설 수 있다. 한 줄로 서도, 앞 번호와 뒷 번호로 나누어 서도, 홀수와 짝수로 서도 성별로 나뉘지 않는다. 주변에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다. 가까이 있으니까 말도 한 번 더 붙여보게 되고 여자와 남자가 섞여 있는 게 자연스러워진다.
번호가 두 종류이다 보니 헷갈려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다. 아무래도 저학년 학생들은 연습이 필요하다. 다행히 뽑기 번호대로 줄 서기 놀이를 몇 번 하니 금방 익혔다. 학기 초반에 겪는 약간의 수고로움에 비해 일 년 동안 장기적으로 얻는 장점이 훨씬 크기에 감히 강력 추천해본다.


(뽑기 번호대로 줄 서기 놀이 중인 학생들)
2. 자리 정하기
자리를 정할 때도 뽑기 막대를 활용한다. 칠판에 책상 배열에 맞춰 1부터 21까지 숫자를 적고 학생들이 나와 숫자 막대기를 하나씩 뽑는다. 자신이 뽑은 숫자에 해당하는 자리가 새로 바뀐 자리다. 많은 교실에서 랜덤으로 자리를 정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른 점이라고 하면 여자 자리와 남자 자리를 구분하지 않는 것 뿐이다. 이렇게 자리를 정하면 성별 구분 없이 무작위로 섞여 앉게 된다. 모둠 구성도 자연스레 성별 구분 없이 할 수 있다.




(모둠 활동을 하는 모습. 성비는 다양하다.)
여자와 남자가 짝이 되게 자리를 배치하던 때가 있었다. 모둠 구성도 성비를 고려해서 짰다. 남자와 여자의 특성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비가 비슷해야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별 구분을 없애고서 알았다. 학생의 특성을 성별 만으로 예단할 수 없을 뿐더러, 비슷한 성향의 학생들끼리 모이더라도 그 안에서 학생들은 저마다의 해결책을 찾아낸다는 걸.
언제나 여자와 남자가 짝이고 여자 둘, 남자 둘이 모둠이면 자꾸 역할이 고착화된다. 글씨 쓰는 건 여자가, 발표하는 건 남자가 주로 맡는 식이다. 성별 구분 없이 모둠을 구성하면 다양한 역할을 경험하게 된다. 모둠에 여자나 남자가 없을 수도 있다. '여자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남자가 경험해보게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 또 여자와 남자가 함께 어울려 재미있게 노는 경험도 한다. 성별이라는 제약은 서서히 옅어진다.
3. 팀 나누기
체육 시간이나 놀이 시간에 팀을 나눠야 할 때면 어김없이 뽑기 막대를 꺼낸다. 나는 숫자를 보지 않고 무작위로 막대를 뽑아 적힌 번호를 부르고, 번호가 불리는 사람들끼리 한 팀이 된다. 성비는 고려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지 않아도, 성비를 맞추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고 유익한 체육 수업이 가능하다.
팀 간의 실력 차를 고르게 나누려고 애써보던 때도 있었으나 생각보다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자라고 체육을 다 잘하는 것도, 여자라고 못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성비를 맞춘다고 실력이 비슷하게 나뉘지 않았다. 단순히 체육을 잘하는 학생, 못하는 학생으로 나누기도 어려웠다. 종목에 따라 잘하는 학생이 달랐기 때문인데 달리기는 잘하지만 구기 종목은 약한 학생이 있는가 하면, 운동 기능은 부족하지만 전략을 잘 세워 실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학생도 있다.
효과는 미미한데 부작용은 확실했다. 남학생이 체육을 더 잘할 것이라는 나의 고정관념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 체육을 잘 하는 학생은 환영받고 그렇지 못한 학생은 불청객이 된다. 고정관념과 편견이 자리잡았다. '우리 팀이 여자가 한 명 더 많잖아요. 불리해요.', '체육 잘하는 남자애들 다 이 팀에 모였네, 앗싸 우리가 이기겠다!' 이런 말들이 들려온다. 팀 안에서 남학생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여학생은 뒷전으로 밀리기도 한다. 그래서 무작위로 섞기 시작했다.


(열심히 티볼 경기 중인 모습. 학생들은 더는 성비에 연연하지 않는다.)
대신 타고난 실력이 승패를 온전히 좌우하지 않도록 활동을 준비한다. 충분히 연습할 시간을 주고 점수 격차가 너무 커지지 않게 규칙을 수정한다. 매번 랜덤으로 팀을 바꿔 역할이 고착화되지 않도록 한다. 지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한다. 팀은 늘 바뀌고 오늘 졌어도 내일은 이길 수 있다. 남학생이 많은 팀이 유리할 것 같지만 경기를 해 보기 전에는 결과를 알 수 없다. 체육 실력이 출중한 여학생들도 정말 많다. 구성원들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란 것이 있어서, 질 것 같았던 팀이 서로 으쌰으쌰 하더니 마침내 이기기도 한다.
성별 구분을 없애자 수업은 더 흥미진진해졌고 더 많은 학생들이 체육 수업에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막대기를 섞는다. 서로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도 마구마구 섞여 흐릿해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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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한 학급 운영에 거창한 준비는 필요 없다. 스물 한 개의 막대기 만으로도 쉽고 간단하게 시작할 수 있다. 성별 구분을 없애는 게 성평등 교육의 전부는 아니지만, 의미있는 출발점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 만으로도 교실에는 큰 변화가 시작된다.
나의 성평등한 학급 운영 필수템
22.05.01. 초식공룡
(나의 성평등한 학급 운영 필수템)
새학기 준비 기간이 되면 가장 먼저 준비하는 교구가 있으니, 일명 '뽑기 막대'다. 출석 번호부터 자리, 체육 팀 구성까지 이 막대기를 뽑아서 정한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학교 자료실을 뒤적여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찾는다. 우리 반 학생 수에 맞게 21개를 챙겼다. 그리고 막대의 한쪽 끝에 매직으로 1부터 21까지 번호를 적으면 끝. 담아 둘 마땅한 통이 안 보여서 다 먹고 남은 커피 상자에 넣어두었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 완성된, 어찌 보면 볼품없고 초라한 이 스물 한 개의 막대기가 나의 성평등한 학급 운영 필수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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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호 정하기
슬프게도 우리 학교는 아직 출석 번호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있다. 한 해는 남자가 앞 번호, 다음 해는 여자가 앞 번호를 번갈아가며 하는 식이다. 그래서 우리 반은 3월 첫 날 번호를 새로 정한다. 막대기를 뽑아 정하는 번호라고 하여 '뽑기 번호'라고 부른다. 방법은 간단하다. 한 명 씩 나와 막대기를 뽑는다. 막대에 적힌 숫자가 1년 간 함께 할 자신의 뽑기 번호다.
뽑기 번호 덕분에 손쉽게 성별 구분 없이 줄을 설 수 있다. 한 줄로 서도, 앞 번호와 뒷 번호로 나누어 서도, 홀수와 짝수로 서도 성별로 나뉘지 않는다. 주변에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다. 가까이 있으니까 말도 한 번 더 붙여보게 되고 여자와 남자가 섞여 있는 게 자연스러워진다.
번호가 두 종류이다 보니 헷갈려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다. 아무래도 저학년 학생들은 연습이 필요하다. 다행히 뽑기 번호대로 줄 서기 놀이를 몇 번 하니 금방 익혔다. 학기 초반에 겪는 약간의 수고로움에 비해 일 년 동안 장기적으로 얻는 장점이 훨씬 크기에 감히 강력 추천해본다.
(뽑기 번호대로 줄 서기 놀이 중인 학생들)
2. 자리 정하기
자리를 정할 때도 뽑기 막대를 활용한다. 칠판에 책상 배열에 맞춰 1부터 21까지 숫자를 적고 학생들이 나와 숫자 막대기를 하나씩 뽑는다. 자신이 뽑은 숫자에 해당하는 자리가 새로 바뀐 자리다. 많은 교실에서 랜덤으로 자리를 정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른 점이라고 하면 여자 자리와 남자 자리를 구분하지 않는 것 뿐이다. 이렇게 자리를 정하면 성별 구분 없이 무작위로 섞여 앉게 된다. 모둠 구성도 자연스레 성별 구분 없이 할 수 있다.
(모둠 활동을 하는 모습. 성비는 다양하다.)
여자와 남자가 짝이 되게 자리를 배치하던 때가 있었다. 모둠 구성도 성비를 고려해서 짰다. 남자와 여자의 특성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비가 비슷해야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별 구분을 없애고서 알았다. 학생의 특성을 성별 만으로 예단할 수 없을 뿐더러, 비슷한 성향의 학생들끼리 모이더라도 그 안에서 학생들은 저마다의 해결책을 찾아낸다는 걸.
언제나 여자와 남자가 짝이고 여자 둘, 남자 둘이 모둠이면 자꾸 역할이 고착화된다. 글씨 쓰는 건 여자가, 발표하는 건 남자가 주로 맡는 식이다. 성별 구분 없이 모둠을 구성하면 다양한 역할을 경험하게 된다. 모둠에 여자나 남자가 없을 수도 있다. '여자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남자가 경험해보게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 또 여자와 남자가 함께 어울려 재미있게 노는 경험도 한다. 성별이라는 제약은 서서히 옅어진다.
3. 팀 나누기
체육 시간이나 놀이 시간에 팀을 나눠야 할 때면 어김없이 뽑기 막대를 꺼낸다. 나는 숫자를 보지 않고 무작위로 막대를 뽑아 적힌 번호를 부르고, 번호가 불리는 사람들끼리 한 팀이 된다. 성비는 고려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지 않아도, 성비를 맞추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고 유익한 체육 수업이 가능하다.
팀 간의 실력 차를 고르게 나누려고 애써보던 때도 있었으나 생각보다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자라고 체육을 다 잘하는 것도, 여자라고 못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성비를 맞춘다고 실력이 비슷하게 나뉘지 않았다. 단순히 체육을 잘하는 학생, 못하는 학생으로 나누기도 어려웠다. 종목에 따라 잘하는 학생이 달랐기 때문인데 달리기는 잘하지만 구기 종목은 약한 학생이 있는가 하면, 운동 기능은 부족하지만 전략을 잘 세워 실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학생도 있다.
효과는 미미한데 부작용은 확실했다. 남학생이 체육을 더 잘할 것이라는 나의 고정관념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 체육을 잘 하는 학생은 환영받고 그렇지 못한 학생은 불청객이 된다. 고정관념과 편견이 자리잡았다. '우리 팀이 여자가 한 명 더 많잖아요. 불리해요.', '체육 잘하는 남자애들 다 이 팀에 모였네, 앗싸 우리가 이기겠다!' 이런 말들이 들려온다. 팀 안에서 남학생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여학생은 뒷전으로 밀리기도 한다. 그래서 무작위로 섞기 시작했다.
(열심히 티볼 경기 중인 모습. 학생들은 더는 성비에 연연하지 않는다.)
대신 타고난 실력이 승패를 온전히 좌우하지 않도록 활동을 준비한다. 충분히 연습할 시간을 주고 점수 격차가 너무 커지지 않게 규칙을 수정한다. 매번 랜덤으로 팀을 바꿔 역할이 고착화되지 않도록 한다. 지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한다. 팀은 늘 바뀌고 오늘 졌어도 내일은 이길 수 있다. 남학생이 많은 팀이 유리할 것 같지만 경기를 해 보기 전에는 결과를 알 수 없다. 체육 실력이 출중한 여학생들도 정말 많다. 구성원들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란 것이 있어서, 질 것 같았던 팀이 서로 으쌰으쌰 하더니 마침내 이기기도 한다.
성별 구분을 없애자 수업은 더 흥미진진해졌고 더 많은 학생들이 체육 수업에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막대기를 섞는다. 서로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도 마구마구 섞여 흐릿해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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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한 학급 운영에 거창한 준비는 필요 없다. 스물 한 개의 막대기 만으로도 쉽고 간단하게 시작할 수 있다. 성별 구분을 없애는 게 성평등 교육의 전부는 아니지만, 의미있는 출발점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 만으로도 교실에는 큰 변화가 시작된다.